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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층에 불이 켜져 있었다.

미나는 마당에 있는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먼저 온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 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유나라면 괜찮겠지만, 하정은 보고 싶지 않았다. 요즘 하정은 자신을 찌를 준비가 된 칼날 같았다. 오늘은 미나의 퇴근이 평소보다 조금 늦었으니, 유나와 하정 둘 다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둘 다 이미 귀가했다면, 더더욱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미나는 의자에 앉아 2층집을 바라보았다. 유나와 미나가 자란 집이었다. 유나와 미나의 보호자들이 자라고, 살고, 죽은 집이었다. 사용 연한을 지난 지붕은 낡았다. 집 옆에는 어릴 적 유나와 놀던 온실이 있었다. 온실은 본래 날씨가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는 화초를 보호하고 키우던 공간이라고 했다. 이 집의 온실은 두 아이의 놀이터였다가, 지금은 창고가 되었다. 미나가 일하는 도서관의 관장처럼 전기를 끌어대 여전히 온실을 가꾸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보통은 창고로 썼다. 어쨌든 지붕과 문이 있는 공간이니, 아직 처분을 정하지 못한 물건들을 넣어놓고 외면하기 딱 좋았다.

대문이 열렸다. 유나가 들어오다 마당에 앉은 미나를 보고 멈칫하며 섰다. 그렇다면 지금 집에 있는 사람은 하정이다. 유나는 대문과 현관문을 번갈아 보며 눈을 굴리다, 미나 옆으로 천천히 걸어와 눈치를 보며 옆에 앉았다.

미나는 유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유나 탓이 아니었다. 깊이 생각하면 유나의 잘못이 조금쯤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생각이 다른 짝을 선택한 것도 잘못이 아니다. 유나가 나가는 대신 하정이 그들의 집에 들어오기로 한 것도 잘못이 아니다. 그 일에는 미나도 동의했었다. 이미 했던 결정을 사랑 때문에 바꾸지 않는 것 또한, 아마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생각을 입 밖에 내어 말하면서까지 유나의 마음을 달래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괜찮지는 않았다. 잘못이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불편한 상황은 불편한 상황이다. 해가 저물면 추워질 것이다. 배도 슬슬 고팠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결국 집에 들어가야 했다. 그러면 세 사람은 순서대로 욕실을 쓴 다음, 식탁 하나에 어색하게 앉아 저녁 식사를 하겠지.

“하정이 먼저 왔나 보네.”

유나가 불 켜진 집을 보며 말했다.

“응. 누가 먼저 왔는지 몰라 그냥 있었어.”

미나가 중얼거리자, 유나가 겸연쩍게 웃었다.

“불편해서 못 들어간 거지? 미안해.”

미나는 유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찔렀다.

“미안한 줄 알면 어떻게 좀 해봐. 나만 둘 사이에 껴서 이게 뭐야. 갈 곳도 없는데.”

유나가 온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실 치우고 내가 온실로 들어갈까? 좀 고치면 지낼 만할걸.”

미나는 그들이 버리지 못해 처박아놓은 물건들이 가득할 온실 안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젠가부터, 정확히는 하정의 입주를 위해 대청소를 했던 날부터는, 온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문을 열고 물건들을 집어넣기만 했다. 온실은 이제 두 사람이 차마 쓰레기라고 부르지 못하는 과거의 물건들을 모은 쓰레기통이었다.

“수리가 문제가 아니잖아. 안에 있는 거 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리고 언니가 온실에 들어가면 하정 씨는 집 안에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차라리 집 안에서 싸워. 온실까지 쓰면 그냥 전선 확대야. 그때부터 난 여기에도 못 앉아 있을걸.”

유나가 엉덩이를 살짝 붙여오며 쿡 웃었다.

“그럼 네가 온실로 갈래? 너 어릴 때 저기서 놀기 좋아했잖아.”

“아, 진짜!”

미나는 말로는 질색을 하면서도, 유나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옷 사이로 전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어쨌든 둘은 수십 년을 함께한 자매였다. 같이 태어나 함께 자랐다. 같이 적성검사를 받았고, 결과를 놓고 함께 고민했다. 같이 우주항에서 준을 떠나보냈고, 엄마의 유골함을 함께 닦았다. 미나는 유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좀 봐줘. 하정 씨한테는 나만큼 준비할 시간이 없었잖아.”

“처음에 다 말했었단 말이야.”

유나가 투덜거렸다.

“그때는 하정 씨가 언니를 몰랐나 보지. 아니면 언니 생각이 바뀔 줄 알았거나.”

유나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미나는 유나가 하려던 말을 알고 있었다. 하정의 기대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 유나가 말을 하려다 만 이유도 알고 있었다. 미나한테 그렇게 말할 염치는 없는 것이다. 유나가 하소연을 했다면, 미나는 이렇든 저렇든 퇴근하고 집에도 못 들어가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내 꼴은 네 탓이라고 한숨을 쉬면서도, 유나의 손을 잡아주었을 것이다. 둘은 이 모든 전개를 예상했고, 그래서 생략하기로 했다. 없어질 행성에 태어나 언젠가 헤어질 자매로 산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2

 

하정은 고장 난 전차에서 유나를 만났다.

카두케우스 본사는 네로보 항성계 주민들의 체류 기간을 3세대 연장하면서, 마지막 세대가 전원 이주할 때까지 생활을 보장하기로 했었다. 하정의 할머니 세대가 했던 계약이었다. 마지막 3세대 연장 거주민들에게는 네로보 항성계에 남을지, 주거와 일자리를 받아 다른 항성계로 이주할지, 근처에 새로 건설될 라세진 항성계의 개척 세대가 될지 결정할 기회가 두 번 주어졌다. 열여덟 살이 될 때 한 번 결정하고, 서른 살까지 그 결정을 한 번 더 바꿀 수 있었다.

하정의 할머니는 그때 사람들이 본사에 얼마나 열심히 항의했는지, 다음 세대를 위해 계약기간을 연장하려고 얼마나 온 힘을 다해 싸웠는지 하정에게 얘기하곤 했다. 초광속 통신 담당자들은 파업을 했다. 준광속선 비행사들도 파업을 했다. 네로보의 행성들은 협상 연대체를 구성하고 새로운 깃발을 만들었다. 집집마다 네로보 연대 깃발을 걸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마을의 하수순환처리소에서 일했기에 파업할 일도 협상 연대체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지만, 협상 연대체로부터 받은 수정 프로그램을 하수처리 과정에 적용해 네로보 연대 깃발색 염료를 추가 생산했다. 할머니는 그 일을 자랑스러워했다. 그 마을에 깃발을 달지 않는 집이 단 한 집도 없었는데, 다 할머니 덕분에 염료가 넉넉했던 덕분이라 했다. 하정의 집에는 연대체 깃발이 꽤 많았다. 모든 주민들이 깃발을 내린 다음에도, 할머니는 추가 생산 염료로 만든 깃발을 수거해 보관했다. 하정의 아버지는 깃발을 커튼 대신 썼다. 테이블보로도 쓰고 행주와 걸레로도 썼다. 그래도 남은 깃발이 온실 창고에 쌓여 있었다. 하정은 깃발을 꿰매 가방을 만들었다.

하정은 유나와 만났던 날, 바로 그 고동색 가방을 들고 고장 난 전차에 앉아 있었다.

체류 기간 연장, 순차적 이주, 생활환경 보장. 네로보 항성계 이주 19세대 연대체와 카두케우스 본사 사이의 갱신계약은 아주 길고 복잡했고, 체결에만도 수십 년이 걸렸다.

생활환경 보장 계약에 따라 대중교통은 없어지지 않았다. 다만 배차간격이 길어졌다. 모든 것이 점점 더 자주 고장 났다. 온실이 창고가 되었다. 폭우나 폭설이 내렸다. 수돗물은 온수와 냉수 구분 없이 미온수만 나왔다. 모든 것이 낡아갔다. 사람들은 점점 더 긴 시간을 있는 설비를 유지하는 데, 낡은 설비를 고치는 데, 고칠 수 없는 물건의 다른 용도를 찾는 데 썼다.

하정의 할머니는 하수순환처리소의 프로그래머였다. 아버지는 시 공용 저수조의 용량 관리자였다. 하정이 어릴 때 저수량 측정 장치가 고장이 났다. 장치는 고쳐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배운 대로 사무실에서 일하는 대신 저수조에 긴 밧줄과 사다리를 설치하고 직접 저수조에 내려가 저수량을 쟀다. 저수조 고장을 먼저 겪었다는 이웃 시에서 알아 온 노하우였다. 하정은 아버지가 설치한 사다리 관리자였다. 저수조에 사다리가 필요 없는 시절도 있었을 테고, 사다리의 안전을 무인로봇으로 점검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하정은 사다리를 한 칸 한 칸 밟아 내려가며, 칸마다 하중측정기를 끼워가며 점검해야 했다.

전차의 문이 열렸다. 내리는 사람도 있었고, 전차가 다시 움직이기를 앉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정은 기다렸다. 그날은 사다리를 오르내린 날이었다. 하정은 빈 도시락이 든 가방을 옆에 놓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전차에서 하나둘 내렸다. 정말이지 더는 걷고 싶지 않았다. 남은 사람보다 내린 사람이 많아졌을 때, 유나가 하정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세요? 혹시 제 차 같이 타고 가실래요?”

하정은 유나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이거 한참 안 움직일 것 같은데, 걸어가기도 환승하기도 애매해 동생을 불렀거든요. 동생이 집에서 차 갖고 데리러 오기로 했어요. 이 노선 타셨으면 아마 저랑 같은 방향으로 가실 테니, 저희가 데려다드릴 수 있는 곳까지만이라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유나가 잠깐 생각하더니 오른손으로 위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동생이 올 때까지도 이 꼴이라면요.”

“아, 감사합니다. 그러면 감사하지만 폐를 끼치기가…… 어디 사시는지 여쭤봐도……?”

하정은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서끝마을요.”

유나가 선뜻 대답했다. 종점이었다. 하정의 마을을 지난다.

“아, 저는 서남에 삽니다. 가시는 길에 있으니, 그러면 신세 좀 지겠습니다.”

하정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부탁했다. 낯선 사람의 친절을 사양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서남마을에서 서끝마을 사이 거리라면 카풀이 아주 드문 일도 아니었다. 미나가 작은 삼륜차를 몰고 나타날 때까지도 전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나의 삼륜차는 운전석과 뒷좌석만 있는 2인승이었다. 하정의 몸집에 비해 아주 작았다. 유나와 하정은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엉덩이와 어깨가 빡빡하게 맞닿았다. 하정은 고동색 가방을 이리저리 옮겨보다가, 결국 머리 위에 얹었다. 가방을 손으로 잡으려니 팔꿈치가 자꾸 유나의 볼을 찔렀다. 목에 힘을 주니 정수리와 차 천장 사이에 가방이 딱 맞았다. 하정은 양팔을 몸에 딱 붙이고, 가방이 떨어지지 않게 목을 쭉 뻗어 가방을 머리로 받쳤다.

유나는 오른팔은 아예 창문 밖으로 내놓고, 하정과 가까운 왼팔은 가슴 앞으로 뻗어 운전석의 머리 받침을 잡았다. 포장이 거친 곳을 지날 때마다 하정의 도시락통이 덜그럭거렸다. 미나는 유나에게 뒤에서 머리카락 좀 잡아당기지 말라며 짜증을 냈다. 유나는 하정의 도시락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그를 돌아보고 웃었다. 미나가 짜증을 내면 미나의 머리 받침을 잡고 있던 손을 과장스럽게 떼며 하정에게 눈을 찡긋했다. 하정은 유나를 보려 고개를 돌리거나 유나를 따라 웃다가 차 천장과 정수리 사이에 끼운 가방이 떨어질까 봐 목에 빳빳이 힘을 주고 눈만 굴려 답했다. 서남마을까지는 20분이 걸렸다. 미나가 마을 입구 표지판 앞에 차를 세웠다. 유나는 차가 정차하자마자 뛰어내렸다. 하정은 목에 주었던 힘을 풀고, 옆으로 툭 떨어진 가방을 받았다. 유나는 하정의 퇴근 시간을 묻고, 퇴근길 카풀을 제안했다. 하정에게야 좋은 일이었지만, 유나에게는 득이 없었다. 하정의 말에, 유나는 웃으며, 혼자 2인승 차를 쓰는 것은 낭비라 전차를 타고 다녔지만, 둘이 탄다면 에너지를 아끼는 셈이니 자기도 좋다고 했다. 약간 이상한 논리였다. 게다가 차를 운전했던 사람은 미나였다. 하정은 유나의 뒤에 선 미나를 쳐다보았다. 미나는 하정과 눈이 마주치자,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반년 정도 함께 퇴근했다. 유나가 하정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다. 유나는 하정의 집 안 곳곳에 남은 깃발을 보고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의 유품이 남은 단정한 온실을 구경했다. 하정의 집에서 잤다. 하정과 같은 고동색 가방을 들었다.

 

3

 

셋은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먹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식탁이었다. 미나는 중재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미나는 유나가 무책임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남인 하정의 편을 들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에 다 말을 하기는 했다는 유나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유나는 이주 계획을 숨긴 적이 없었다. 특히 준이 라세진 항성계 개척 1세대로 떠난 다음부터, 가족에게 유나의 출항은 기정사실이었다.

유나는 라세진 항성계로 가고 싶어 했다. 미나가 보기에도 라세진 항성계는 유나에게 완벽한 미래였다. 유나는 이주적합도도 높았고 적성검사 결과도 좋았다. 유나는 적성검사 결과와 본사의 권고대로 농기술을 배웠고,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라세진 항성계 이주를 결정해 신청서를 냈다. 아마 신생 항성계는 역동적일 것이다. 여러 곳에서 온 새로운 사람들도 많고, 환경도 계속 바뀌고, 많은 일들을 새로 결정하겠지. 유나의 상상 속에서 라세진 항성계는 모험을 좋아하는 즐거운 친구들이 가득한 여름 캠프였다.

유나는 라세진이라는 캠프에서의 계획을 미나에게 늘어놓곤 했다. 그 캠프에는 고장 난 시설이 없었다. 몇 번 두드려야 작동하는 기계도 없었다. 손이 많이 가는 텃밭 대신 자동급수 시스템과 로봇이 있는 넓은 평야가 있었다. 제대로 작동하고 아름다운 화초로 가득한 온실도 있었다. 평야의 농작물을 살피고 온실의 꽃들을 가꾼 다음, 집에 돌아가 차를 우려도 될 것 같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얼음을 넣은 물을 마셨다. 그리고 물론 주말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고. 아이도 열 명쯤 데려다 키울지도 모르고.

유나가 이 모든 이야기를 하정에게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동생인 미나한테 떠든 것보다 좀 더 어른스럽고 현실적인 버전이었을 테고, 아마 연애나 아이들 부분은 어물어물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유나가 어떻게 보아도 네로보에서는 불가능한 쾌적한 여름 캠프 같은 삶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정은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나에게는 라세진 항성계로 먼저 떠난 가족까지 있었다. 유나의 계획이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선명하고 활기차긴 했지만 다 허튼소리는 아니었다. 유나는 떠날 사람이었다.

미나가 먼저 식사를 끝냈다. 오늘의 요리 담당은 하정, 설거지 담당은 미나였다.

“다 먹고 나면 올라와서 말해줘.”

미나가 고동색 테이블보 모서리를 향해 말하고 일어섰다. 미나가 계단을 올라 사라지자마자, 유나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안 될까?”

“뭘?”

하정이 고개를 들지 않고 대꾸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유나가 양손을 휘둘렀다.

“이거, 이거 말이야. 불편하게 하는 거.”

“내가 뭘.”

유나는 시선을 피하고 있는 하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처음부터 떠날 사람이라고 했었잖아.’, ‘이렇게 눈치만 주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해. 그래야 나도 답을 하지.’, ‘왜 제대로 말을 안 해?’

유나는 이 모든 말을 입속으로 삼켰다. 유나가 아무리 말을 하라고 해도, 하정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정은 유나의 답을 듣고 싶지 않으니까 유나에게 묻지 않는다. 하정은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마치 오늘 일과처럼 담담히 말하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할머니가 남긴 깃발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방으로 만들어 쓰는 사람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다고 하는 대신 아버지가 설치한 사다리를 보수하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유나와의 카풀을 계속하기 위해 교대근무표를 말없이 바꾸었던 사람이었다. 사귀자는 고백으로 손바느질한 고동색 가방을 내밀었던 사람이었다. 유나와 살림을 합친 다음에도 꼭 정기적으로 본가에 가서,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을 청소하는 사람이었다.

하정은 그런 식으로, 계속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정의 사랑은 신중했고, 조용했고, 따뜻했다. 유나는 하정의 사랑이 좋았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좋기만 했다. 그다음에는 조금씩 더 좋아졌다. 행복은 점점 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갔다. 행복은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조곤조곤 그날 하루 일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하정이 되었다. 식후의 차는 의식(儀式)이 되어 유나의 일상에 들어왔다. 일터에서 재미있는 일이나 답답한 일이 있을 때, ‘오늘 저녁에 하정에게 얘기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날이 늘었다. 유나는 선선한 날이면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하정의 체온이 좋았다. 더운 날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으면 잠결에도 꽤 세게 유나를 밀어내고 이불까지 걷어차는 하정도 좋았다. 행복은 그렇게 기온에 스며들었다. 하정은 시 공용 저수조 정밀점검을 특히 고달파했다. 그런 날 유나가 종아리를 주물러주면, 하정은 늘 괜찮다고 했다가도 긴장을 풀며 나른하게 웃었다. 유나는 매월 초 회사 게시판에서 저수조 정밀점검일을 확인했다. 행복은 게시판을 꼼꼼히 읽는 시선이 되었다.

유나는 이 모든 변화가 좋았다. 정말 좋았다. 유나는 하정을 끌어안고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정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래서 유나는 몰랐다. 두 사람이 생각한 끝이 달랐다는 것을.

유나는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 하정에게 이주 신청자라고 밝혔다. 보호자였던 준이 이미 라세진 항성계로 떠났고, 출항 시기가 맞아떨어진다면 준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했었다. 당장 먹고살 거리를 마련하기 바쁜 낡고 작은 농지가 아니라 여러 작물을 가꾸고 작황을 실험해보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도, 지금처럼 손이 많이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장에 거의 나가지 않고도 농지를 관리할 수 있는 첨단 시설을 직접 다루어보고 싶다고도 했었다.

유나는 하정에게 전부 다 말했고, 하정은 괜찮다고 했었다. 아니, 괜찮다고는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하정의 반응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괜찮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보니 하정은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 유나가 결정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유나는 네로보 항성계를 떠나지 않는 삶을 상상한 적조차 없었다. 하정과 동거를 시작했던 해, 유나는 스물일곱이었다. 유나에게 이 사랑은 처음부터 끝이 있었다. 본사의 이주 통보가 올 때까지의 일이었다. 유나의 삶에서 소중하지만 지나갈 이야기였다.

행복은 유나의 서른 살이 다가오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식탁에서, 지금처럼 셋이 식사를 한 다음 하정과 유나는 차를 마시고 미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정은 마치 내일 아침 메뉴를 묻듯이 물었다.

“변경 신청 했어?”

“무슨 변경 신청?”

“항성 간 이주 신청 했던 거. 네 생일이 11월이니까, 체류로 변경하려면 마감까지 이제 딱 반년 남았잖아. 생각해봤어?”

유나는 하정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유나의 얼굴을 보는 하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라세진 항성계로 이주 신청한 것 말이야. 열여덟 살 때 했다고 했었지? 만 서른 살 전까지는 결정을 바꿀 수 있잖아. 남는 쪽으로 생각해봤어?”

유나는 그제야 하정의 말을 알아듣고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때의 하정이 이 질문을 아주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아마 그날 하정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 말을 먼저 꺼냈으리라. 하정은 아마 유나가 먼저 변경 신청을 하고 자신에게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해가 바뀌어도 유나가 아무 말 않으니 의심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다가, 미나가 설거지 당번이고 두 사람 모두 잔업도 격무도 없었던 날 저녁을 골라, 아마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어떻게 그 대화를 시작할지 말을 고르고 고른 다음 입을 열었으리라.

그러나 유나는 그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너무 빨리, 생각하던 그대로 답했다.

“아니. 갈 건데 뭐 하러?”

유나의 답에 하정이 지었던 표정을, 언젠가부터 항상 하정의 얼굴이라는 형체를 띠고 있던 행복의 존재감이 사라지던 순간을 유나는 잊지 못하리라. 아마 오랫동안, 앞으로 어디에 살든, 무엇을 하든, 누구를 사랑하든.

“알았어.”

 

4

 

출근하자마자 팀장이 불렀다.

“하정 씨, 업무분장표가 꽤 바뀔 수도 있어요. 우리 저수조관리팀에서는 나가는 사람이 없긴 한데, 일단 알고는 있어요. 한동안 좀 어수선할 거예요.”

“네?”

“이번에 행성 전체에서 갑자기 수질관리 인원이 너무 많이 빠져요. 당장 우리 처리소도 다 합치면 열 명 넘게 줄어요. 부소장님도 명단에 들어갔어요.”

“부소장님까지요? 부소장님은 거의 20년 넘게 여기서 일하셨잖습니까.”

“아, 이주자세요. 언제더라, 한 8년 전에도 이렇게 갑자기 사람이 많이 빠졌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이주자 명단에 안 들어갔던 부소장님이 그나마 경험이 제일 많으니까 이쪽으로 옮겨 오셨던 거예요. 원래 소장님보다 부소장님이 경험이 많았는데, 그래서 체류자인 소장님이 소장 하고 이주자인 부소장님이 부소장 맡으셨다나.”

“다른 시 처리소도 마찬가지 상황입니까?”

“네, 이번에 전체적으로 본사에서 중간관리자급에 전보를 많이 냈어요. 수질관리 쪽 사람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오늘 오후에 명단 취합 끝나면 처리소마다 빠질 사람들이 맡은 일 확인하고, 남은 사람들을 다시 나눠서 바로 인수인계 들어갈 거예요.”

하정은 게시판을 확인했다. 본사의 이주 명령서와 전보 명단이 붙어 있었다. 팀장의 말대로 이번에는 명단이 꽤 길었다. 하정이 얼굴까지 알고 이야기를 나누어본 사람들도 몇 보였다. 부소장은 나이가 적지 않았다. 잘은 몰라도 마흔이 넘은 것은 확실했다. 물론 이주 명령은 몇 살에라도 나올 수 있다. 본사가 필요로 하는 인력이라면 이주한다. 네로보 항성계에서는 이주 신청자를 가능한 중간관리자 이상의 자리에 배치하지 않았다.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 행성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이 떠나면, 남은 사람들의 부담이 컸다. 그렇지만 아무리 피하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언제 이주 명령이 나올지 모르는데, 이주 신청을 한 사람들이 모두 단순 업무만 계속 맡을 수는 없었다. 사람은 늘 부족했고 경험이 있는 사람들, 예전에 일하던 방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하정은 저녁에 임시 교대근무표를 받았다. 맡은 업무는 유지하되 이주민들을 실어 갈 우주선이 올 때까지 3교대가 2교대로 변경된 일정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한두 가지 더 맡거나 근무시간이 늘어났다. 몇몇 사람들의 이름 옆에 세모(△) 표시가 붙어 있었다. 떠날 사람들이었다. 세모 표시가 붙은 부소장은 마흔일곱 살이었다.

그날 저녁, 하정은 유나, 미나와 이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의 직장에도 이주 명령이 나왔다. 유나의 직장에서는 나가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미나가 일하는 도서관에서는 한 명도 없었다.

“마흔일곱 살에 이주 명령을 받으면 어떤 기분일까?”

“이제 가나 보다 하겠지.”

유나가 토마토를 베어 물며 말했다.

“47년이나 여기서 태어나 살았는데?”

“원래 그런 계약이었잖아.”

토마토의 무른 씨와 과즙이 접시로 뚝뚝 떨어졌다. 유나는 고동색 냅킨에 손을 대강 닦으며 말을 이었다.

“스물다섯 살에 갈 수도 있고 서른다섯 살에 갈 수도 있고, 마흔일곱 살이라도 뭐, 이상한 건 아니지. 우리 쪽은 워낙 처음부터 이주 신청자가 많고 나가기도 매번 많이 빠지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처리소 쪽은 안 그러다가 갑자기 많이 빠졌으면 좀 어수선하겠다. 금방 적응돼. 있는 사람들로 다 굴러가게 되어 있어.”

유나의 말에 미나가 하정과 유나를 번갈아 보더니, 유나를 향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유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한데, 하정 앞에서는 하고 싶지 않을 때 보이는 습관이었다.

유나가 미나의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왜? 친한 사람이야?”

“아니, 그런 건 아냐.”

하정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나가 일어나 식탁 한가운데에 있던 물병을 들었다.

“물 좀 더 가져올게. 언니, 토마토 더 먹을래? 아니면 감자?”

“아, 난 이거면 됐어.”

유나가 턱 끝으로 자기 접시를 가리키고 하정에게 다정히 물었다.

“너는? 내가 어제 가져왔던 딸기는 어때? 모레 더 가져올 수 있으니까 많이 먹어.”

미나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하정은 억지로 웃었다.

“나도 이걸로 괜찮아.”

“진짜? 어제보다 덜 먹는 것 같은데. 잘 먹고 다녀야지.”

그날의 설거지 당번은 하정이었다. 미나는 설거지를 하는 하정에게 다가와 말했다.

“언니가 좀, 그래요. 사람이 눈치가 없어. 농경 쪽은 워낙 사람이 많이 바뀌니까 더 무심할 거예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미나 씨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죠.”

미나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었다. 유나의 말에도 틀린 곳이 하나도 없었다. 본사는 언제든 필요한 인력에게 이주 명령을 할 수 있었다. 하정의 할머니 세대가 본사와 체결한 갱신계약의 내용이 그랬다. 연장 잔류 세대에게는 이주 여부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 본사에게는 이주 신청자들에 한하여, 필요에 따라 이주 시기를 결정하고 이주를 명령할 권한이 있었다.

그리고 유나는 바로 그 이주 신청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날 밤, 하정은 눈을 감고도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유나는 옆에서 곤하게 잤다. 작게 코도 골았다. 아마 유나에게도, 어쩌면 유나에게 더 피곤한 하루였을지도 몰랐다.

하정은 유나에게 화가 났다. 이주 신청자인 유나에게 화가 났다. 이주 신청자면서 자신을 사랑한 유나에게 화가 났다. 자신을 사랑에 빠지게 한 유나에게 화가 났다.

하정은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투쟁의 역사를 생각했다. 생전 처음으로, 할머니에게도 화가 났다. 할머니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성취는, 깃발을 들고 싸워서 얻었다던 것은 기껏해야 유예였다. 사실 할머니는 결정해야 하는 상황으로부터 도망친 게 아닐까. 결정을 하정의 아버지에게로, 하정에게로, 그리고 하정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로 미루었을 뿐 아닐까.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준다는 핑계를 대며, 자신들은 끝을 보지 않고, 헤어지지 않고 죽을 수 있게 도망쳤던 게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하정은 제풀에 놀라 파드득 떨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하정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유나와 함께 꾸민 침실을 돌아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어서인지, 공간이 몸에 익어서인지 구석구석이 다 보였다. 나란히 놓인 작은 책상, 양쪽 벽에 붙은 각자의 옷걸이. 문 옆 서랍장과 서랍 위에 있는 하정의 가방. 서랍장 밑에 허물처럼 놓인 유나의 가방.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았다. 유나와 하정이 한순간에 행복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유나는 저수조 정밀점검일 밤이면, 하정의 다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고 주물렀다. 하정은 어떤 날에는 예전처럼 유나에게 몸을 맡겼고, 어떤 날에는 시선을 피하며 다리를 내렸다. 하정과 유나는 여전히 한 침대를 썼다. 셋은 여전히 식사와 청소 당번을 돌아가며 맡았고, 아침과 저녁 식사를 의식처럼 함께했다. 하정이 본가를 다녀오겠다며 나가는 날이 늘었다. 그런 날이면, 하정은 본가 온실에서 가져온 깃발 천으로 새 걸레와 행주를 만들어 찬장에 쌓았다. 하정은 늘, 결국, 유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아주 가끔 하정은 한밤중에 베개와 이불을 들고 1층 거실로 내려갔다. 미나가 마당 의자에 앉아 유나의 퇴근을 기다리는 날이 생겼다.

미나는 하정을 붙잡고 언니를 이해해달라고 했다. 유나와도 한참을 이야기한 것 같았다. 자매끼리 언성을 높여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날이면 하정은 귀를 닫았다. 애당초 하정의 행복도, 그 부재도 미나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기에 미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적었다. 하정은 미나에게 조금 미안했다. 조금. 많이 미안해할 여유는 없었다.

 

5

 

9월이 지나고, 10월이 왔다.

 

“그만하면 안 될까?”

“뭘?”

“이거, 이거 말이야. 불편하게 하는 거.”

“내가 뭘.”

 

유나는 할 수 있지만 무의미한 모든 말을 삼키고, 골랐다. 이번에는 그래야 했다.

“나는 이주 신청을 철회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네게 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나한테 미안해?”

하정이 천천히 물었다.

‘미안할 일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미안해.”

“결정을 바꿀 만큼 미안하지는 않은 거지?”

‘내가 이주 신청을 철회하면 네가 행복해질까? 넌 이미 행복하지 않잖아.’

“응.”

“내가 이주 신청을 하면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아직 내년까지 시간이 있어”

‘내가 말릴 순 없지.’

“너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잖아.”

하정은 유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이곳이 좋아. 이주는 생각해본 적도 없어.”

“나는 떠나지 않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어.”

‘알고 있었잖아.’

유나는 억지로 뒷말을 삼켰지만, 하정은 마치 그 말을 들은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넌, 나를, 너만큼. 그러니까. 아니라고 하지만.”

하정의 말이 뚝뚝 끊어졌다. 유나는 하정이 얕은 숨을 뱉을 때마다 사라지는, 한때는 그 얼굴과 목소리와 몸짓과 그들을 둘러싼 공기에 존재했던 어떤 감정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난 언제나 진심이었어.”

유나가 조용히 말했다.

“알아.”

“그걸 사과할 순 없어.”

“사과받고 싶지 않아.”

유나는 생일이 지나자마자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유나가 언제 네로보를 떠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준처럼 1, 2년 내에 이주 명령을 받을 수도, 작년 하수순환처리소 부소장이 그랬듯 십몇 년을 더 살다 떠날 수도 있었다. 둘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어쩌면 아주 길었다. 길었었다. 둘은 유나가 이주하기 전에 헤어질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많은 이유로 헤어진다. 유나의 이주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단지 반드시 일어날 일일 뿐이었다.

유나가 하정을 처음 보았던 날. 같은 전차로 퇴근한다는 것을 알고 시간을 맞춰 다니며 지켜보았던 날. 둘이 탄 전차가 마침 고장 났던 날. 하정이 그 전차에서 내리지 않았던 날. 유나가 하정에게 용기 내어 말을 걸었던 날. 함께 퇴근을 시작한 날. 함께 처음 차를 마신 날. 하정이 유나에게 가방을 선물한 날. 가방의 유래를 말해준 날. 소중히 가꾼 작은 박물관 같은 온실을 열어 보여주었던 날. 그 모든 날들에 이미, 유나의 이주는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다. 유나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 아니었던 것은, 사랑에 빠진 것밖에 없었다.

유나는 하정의 턱 끝에 고였다 떨어지는 눈물과, 젖어 드는 고동색 식탁보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사과받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래도 미안해.”

하정이 딸꾹질을 삼키려 입을 틀어막았다. 유나는 식탁보에 번지는 얼룩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나는 여기서 할머니가 될 거야. 매년 새 천으로 커튼을 만들어 달고, 온실을 작은 박물관으로 정리할 거야. 이웃집 아이에게 우리 할머니 이야기를 해줄 거야.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가방을 만들어 사람들한테 나눠 줄 거야. 다리 힘이 풀릴 때까지 사다리를 오르내릴 거야. 마당은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하게 가꿀 거야. 그리고, 그리고, 또…….”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82매)

 

큐큐퀴어단편선 4 <언니밖에 없네>, 2020



Soyeon Jeong is a South Korean SF writer and English-Korean translator. Her short story collection, Younghee Next Door, was translated into Japanese in 2019. As a translator, her works include The Speed of Dark by Elizabeth Moon, Where Late The Sweet Birds Sang by Kate Wilhelm, and more. She is on Instagram at @sfwriterjeong.